리뷰
 
[] Gryphon Audio / 월간오디오  

북구의 청량한 바람, 그리폰 스타일 The Gryphon Full System

글: 오승영
 
한 때, 오디오 제조사에 메일을 열심히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새로 구한 스피커, 혹은 앰프를 어떤 제품과 ‘매칭’을 시켰으면 좋은지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는데, 대부분의 답변은 ‘딱히 없으니 네가 좋아하는 소리를 찾아 들어라’ 였다. 극성스러운 질문에 대한 성의 없고 사무적인 반응이지만, 답변이라도 해주는 경우는 그나마 친절한 경우에 속한다. 제품의 세부적인 사용방법을 물어보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경우는 많다. 그런 식의 문답이 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필자도 알고 있다. 원래 전략적인 파트너라거나 특정 제품을 기준으로 제작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권장 제품을 규정하는 일은 소비자의 선택폭을 좁혀서 제품 판매에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하튼, 내가 좋아해서 구한 제품인 경우라도 원래 어떤 소리가 나도록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은 오디오파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혹은 늘 따라다니는 궁금증이다. 다양한 사용자를 거느린 히트상품의 경우에도 원래 제조사의 지향점과 사뭇 다른 소리를 내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것조차 ‘재미’로 간과시키면 될 일이겠지만, 알고 나서 구사하는 것과 모르는 채로 즐기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차원에서 원 브랜드(one brand) 시스템이란 오소독스 레퍼런스의 의미를 갖는 존재이다. 일종의 영점을 조정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며, 그 제품의 구석구석을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리얼’ 시스템이 된다.

gs.jpg



그리폰 스타일

웨스턴 일렉트릭 이후의 하이파이 산업은 마치 인간계로 흩뿌려진 신의 반지들처럼 서로 다른 세계로 분화되고 기능화되어 좀처럼 단일 브랜드 아래 전 기종을 통합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이파이의 영역에서는 쿼드, 린, 매킨토시, 그리고 MBL과 부르메스터 정도가 ‘브랜드 패밀리’라고 할만한 지속적인 제품을 유지하고 있어 보인다. 일시적인 시도에 의해 제작되어 후속 모델로 이어지지 않거나 파생된 부속(액티브 스피커에서 분리된 전용 앰프 등)의 경우는 원 브랜드 시스템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하이파이인지, 가전인지, 디자인 브랜드인지 구분이 모호한 제품들도 여기서 말하는 원 브랜드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폰이 하이엔드계에 데뷔한 지 한 세대가 다 되어간다. 화제의 헤드앰프에서 출발한 앰프 전문 브랜드에서 필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디지털과 스피커 라인업까지 편성을 확장한 사운드 그룹이 되어 있다. 그리폰 제품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이 있겠지만, 그리폰의 특징이라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에 걸쳐 있는 특유의 존재감과 전 제품을 관통하는 투철한 일체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회사의 제품은 원래 소비자의 사용을 위한 실용기가 아닌 순수 취미 영역에서 출발해서 라이브뮤직의 음악적 품질을 고유의 디자인 속에 담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원래 회화와 그래픽 전문가인 설립자의 마인드가 반영되어 여타의 하이엔드 브랜드 속에서 쉽게 구분되는 강렬한 블랙 톤의 그리폰 스타일이 창시되었다.
 
그리폰의 이면을 흐르고 있는 두 가지 조류 – 공예품 개념의 디자인과 편집증에 가까운 제품 설계 – 는 하이엔드계에 데니쉬(Danish) 스타일을 정착시키는 데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었고 시간이 갈수록 질과 양을 고양시키고 있어 보인다.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클래식과 트렌드를 적절히 배합시켜, 튀는 스타일의 진보적 성향이나 한숨이 나올 정도로 올드해 보이는 경우가 없다. 시종 차분하고 점잖은 블랙톤을 기반으로 붉은 색과 금빛으로 포인트를 주는 디자인 컨셉으로 다양한 사용자들에게 ‘이것은 그리폰’ 이라는 분명한 인상과 고급기스러운 면모를 크게 어필해오고 있다.

2bx.jpg



그리폰 사운드
 
그리폰이 자체적으로 방대한 음원 카탈로그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에 알게 되었다. 주로50년대 중반~70년대에 걸친 고음질 마스터테입을 확보해서 레퍼런스로 활용하고 있다. 파라비치니, 맨리 등의 빈티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인물들도 스튜디오나 프로용 기기들의 개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듯이, 북유럽 하이엔드의 대표격인 그리폰 또한 프로페셔널 녹음과 엔지니어들과 교류가 많아왔고 이런 경로를 통해 제품개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여하튼, 그리폰은 제품 튜닝시에 본 음원들을 참고로 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데, 그리폰 사운드의 키포인트가 되는 광대역 설계는 라이브 뮤직의 구현을 위한 근거가 된다.
 
광대역 구현을 위한 그리폰의 설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대표적으로 어느 제품이든 좌우 채널을 쌍둥이처럼 두 개로 완벽히 분리시켜 설계 및 제작하고 있다. 상급기로 갈수록 몸체 또한 분리되어 있으나, 한 개의 바디 내에 있는 경우라 해도 좌우가 붙어 있을 뿐 내부는 마치 땅콩처럼 사실상 두 개의 분리된 공간 구조를 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전원부의 독립 및 분리 설계이다. 특히 입력단으로 인해 가장 민감한 프리앰프의 경우 전원부는 기본적으로 별도의 섀시에 수납하고 좌우 별도의 전원을 사용하게 된다. 이론적으로도 그렇지만, 필자의 이전 사용경험으로도 그리폰 앰프의 시청과정에서는 채널간의 상호 간섭이나 전원과 함께 유입되는 여하한의 불필요한 간섭은 원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매우 안정적인 재생력을 장기로 한다.
 
이런 설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고유의 회로구상과 더불어 그리폰이 선택한 방식은 각 부문에 적합한 부품의 사용이다. 예를 들어 프리앰프내 저항은 일본 타쿠만(Takman), 볼륨의 저항은 차크로프트(Charcroft), 파워앰프 전압증폭단에는 제텍스(Zetex), 출력단의 프리-드라이브 트랜지스터는 도시바, 커패시터는 스웨덴 리파(Rifa) 등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설계의 완성을 위해 품질관리를 허술하게 할 리가 없겠지만, 외주 제작하는 콤포넌트의 경우 방산업체나 의료기기업체 등으로 한정해서 정밀성과 신뢰감을 부여하고 있으며 제작된 모든 제품에는 테스트 인증서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최종 테스트는 본사에서 완료해서 출시를 한다.

3hd.jpg



프리앰프 Pandora
 

그리폰의 원류가 되는 헤드앰프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판도라’는 그리폰을 대표하는 제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폰의 플래그쉽 프리앰프로서 파워앰프 메피스토와의 연계를 전제로 하는 다양한 인터페이스의 핵심이 된다. 그리스 신화를 통해 가장 친숙한 이름 중의 하나인 ‘판도라’는 원래는 ‘전능한 재능’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명명이라 생각된다. 자사의 소개대로 본 제품은 판도라의 두 개의 상자, 즉 전원용 바디와 콘트롤 바디로 구성되어 전원부와 오디오 신호를 완벽하게 분리시키고 있으며, 고유의 설계 컨셉에 따라 전원부 또한 좌우 채널이 분리되어 있다. 일단 전원부가 분리되면 대용량 전원 트랜스의 사용이 가능한데, 본 판도라에 사용된 전원부는 최대 100와트 출력이 가능해서 웬만한 파워앰프에 맞먹는 대용량 제품이다.

4hs.jpg


필자가 편집증에 가깝다고 표현했듯이 본 제품은 양산품이라 하기 어색할 정도로 말단에 이르기까지 투철하게 제작자의 손길이 닿아 있어 보인다. 기본적으로 신호의 손실이나 불순물의 유입과의 전쟁과도 같은 설계이다. 고순도 접촉을 위해 내부 배선을 최소화하고, 신호 전송 경로를 최단거리로 축소시키고 있으며, 반대로 디커플링과 전압 레귤레이션은 최대한 확장시키고 있다. 이를 위해서, 전술했듯이, 각 파트에 적절하게 세심히 선별된 부품들이 투입되어 있다. 기판에는 일제 타쿠만(Takman)사의 저항이, 볼륨에는 차크로프트(Charcroft)사의 저항이 사용되고 있다. 양면이 모두 도금되어 있는 기판에는 소켓을 직접 장착시켜 신호손실을 최소화시켰으며 모든 릴레이는 금도금 처리되어 있다.
 
프리앰프와 파워앰프가 분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각자 디스크리트 구성의 듀얼 모노 구조를 하고 있는 관계로 사실상 케이블링이 되는 순간, 풀 밸런스로 연결된 하나의 바디처럼 작동하게 설계되어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본 판도라와 메피스토의 연결시에 작동하는 동사 특유의 ‘그린 바이어스’ 기능인데, 물량투입을 아끼지 않는 그리폰의 철학과는 다소 이질적으로 전력을 절감하는 효율성을 위한 설계이다. 간단히 말해서 볼륨의 양에 따라 A클래스 출력을 조절해서 전원소비와 제품 내 온도를 낮추는 기술이다. 전면의 패널을 통해 모니터링되는 메뉴는 마이크로 프로세서로 작동되며 중앙에 위치한 대형 노브는 85스텝에 걸쳐 매우 촘촘한 단계로 작동하는데, 더블 볼베어링을 사용해서 매우 유연한 촉감으로 회전한다. 알루미늄 재질의 캐비닛은 방진 및 방자 처리되어 있다.


5kg.jpg



파워앰프 Mephisto
 

파워앰프 ‘메피스토’는 그야말로 그리폰의 25주년을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대상이다. 사이즈나 중앙을 가른 통로와 같은 빔 구조 등이 마치 크렐의 90년대 플래그쉽 MRA를 잠시 연상케 한다. 정면의 모습은 동사의 인티앰프 디아블로의 인상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거대한 방열핀이 무색할 정도로 시청을 오래 진행한 이후에도 열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듀얼 모노로 구성된 두 개의 바디로 되어 있는 본 제품에는 그리폰의 축적된 전원 기술이 눈이 부실만큼 화려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6kh.jpg




간략히 정리해 보면, 우선 설립자 플레밍 라스무센이 신뢰해 마지않는 트랜스 설계가 홀름그렌(Holmgren)이 제작한 트랜스를 듀얼로 사용해서 앰프와 디지털회로에 별도의 전원을 공급한다. 트랜스 자체가 분리되어 있다. 서지와 노이즈의 완벽한 필터링을 위한 본 트랜스는 특유의 내부 쉴딩처리로 1-2차 권선간 차폐효과가 뛰어나고 하이펄스 전류 전송에서 실력을 발휘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로 인해 장기적인 사용시에도 안정적이고 안전하다고 한다. 전술했듯이 커패시터는 스웨덴제 리파(Rifa) 56,000마이크로파라트(microfarad) 용량의 제품을 채널별로 8개씩 사용하고 있으며, DC 서보 커플링과 그리폰 와이어링을 거친 전류는 대용량 버스바(bussbar)를 통해 출력단의 40개 출력 트랜지스터로 이동한다. 이에 따라 메피스토는 A 클래스 작동으로 8옴 기준 175와트의 연속출력을 낼 수 있다.
 

7rj.jpg




저 임피던스 구현을 위해 출력 릴레이는 생략되어 있고, 고유의 설계철학대로 NFB를 걸지 않는다. 특히 그리폰에 있어서 NFB로 인해 발생하는 디스토션은 오버댐핑과 메마른 소리의 주범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본 제품에서 구현되는 350MHz를 넘나드는 광대역 재생력은 제로 피드백 설계의 결과로 소개하고 있다. 프리앰프 판도라와 마찬가지로 최단 거리 고효율 신호전송 컨셉의 회로로 설계되어 있으며, 양면 도금된 기판과 타쿠만(Takman) 저항을 사용하고 있다.
 
입력 버퍼회로에는 클래스 A J-FET을 듀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압증폭단에는 제텍스(Zetex)의 트랜지스터를 사용해서 커패시턴스는 낮게, DC 전류 게인은 높게 작동하도록 했다. 또한 전술한 바, 출력단에는 고속의 토시바의 프리 드라이버 트랜지스터가 사용되고 있다. 뒷 패널의 입출력단 또한 눈에 보이는 부분으로서 세심한 구성과 더불어 시각적인 효과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XLR 입력단자는 스위스 뉴트릭사의 제품을, 바인딩 포스트는 스위스제 그리폰 특주품을 사용하고 있으며, 입력과 출력 단자 공히 금도금 처리되어 있다. 기타 보호회로 또한 잊지 않고 있으며, 자동 바이어스 설계되어 있지만 수동으로 3단 바이어스 조절이 가능하다. 본 앰프의 이상과 같은 설계는 순도 높은 신호전송의 극대화와 더불어 안정적인 작동을 위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사에서 자부하는 대로, ‘볼륨 레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설계의, 백그라운드용부터 최대출력까지 소화하는 대용량 앰프’가 메피스토이다.

8uig.jpg




하이브리드 스피커 Trident
 
베이스 유닛을 500와트급 내장앰프로 작동시키는 하이브리드 액티브 3웨이 7유닛 구성의 ‘트라이던트’는 그 자체로서도 시스템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딱 필자의 키만한 높이에 200킬로에 달하는 거함급 스피커이다. 바닥은 스파이크 등을 사용하지 않고 원통형 받침으로 지지된 아웃트리거를 사용하고 있었다. 뒷 패널의 절반은 방열핀이 수직으로 배치되어 있고 싱글 단자의 스피커 터미널 이외에 3종의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는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9ly.jpg





기본적으로 상하대칭구조로 설계된 가상동축 시스템으로서, 더블 우퍼를 듀얼로 사용한(x4) 베이스는 16Hz까지, 스캔스픽의 리블레이터 특주 링 라디에이터는 40KHz까지 커버하는 경이로운 대역을 자랑한다. 특히 리블레이터는 캐비닛 사이즈와 대역을 감안해서 1kg의 하우징에 수납되어 있다. 이러한 광대역에 걸친 각 유닛의 위상 일치, 소위 코히어런트 소스의 완벽한 실현을 위해 내부에서는 지속 위상 크로스오버 설계와 더불어 외부디자인은 배플을 수직방향에서 중앙으로 갈수록 만곡시켜 설계했다. 배플의 곡선과 유닛 주변부는 회절방지까지 고려한 디자인이다. 제품 자체의 중량 영향도 크지만, 손으로 두드려 보면 캐비닛은 진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도록 단단히 내부 보강 처리되어 제작되어 있고 내부 댐핑제는 순모와 합성소재를 섞어 만든 재질로 처리되어 있으며 음압이 94dB에 달하는 고능률 제품이지만 사실은 최대한의 내부용적을 확보해서 마감시킨 밀폐형 스피커이다.


10,.jpg


 
무엇보다 트라이던트의 고유 영역은 룸 어쿠스틱 대응력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다양한 형태의공간에서 저역의 적절한 조절을 위해 Q값을 조절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를 두고 있다는 점은 본 스피커만의 장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디폴트 프리셋 세팅 이외에도 커스텀 세팅이 가능한 Linkwitz-Greiner 설계의 Q-콘트롤러가 그 주인공이다. 하이파이클럽 시청실에서는 디폴트 세팅이 시청에 무난한 관계로 다양한 Q값 세팅을 조합시켜보지는 않았으나 작은 공간에서 특히 마술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액티브 베이스는 스피커 뒷 패널에 있는 푸쉬버튼 및 리모콘으로 볼륨 및 컷오프 주파수를 조정할 수 있으며 편리하게도 손바닥만한 사이즈의 모니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비용의 상관관계가 있겠지만, 주문자가 자신이 원하는 마감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11hf.jpg


1억원을 살짝 넘는 본 제품에는 그 만큼의 막강한 퍼포먼스와 더불어 다양한 사용자의 환경에 대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신선한 대안을 선사하고 있다. 본 시스템은 사운드적으로도 완성도가 뛰어난 조합이지만, 사운드와 디자인의 결합이라는 좀더 총체적인 컨셉으로 어필하는 시스템이 된다.

12fa.jpg


하이파이클럽의 새로 구성된 시청실의 시청환경은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실의 분위기로 연출되어 있어서 주로 시청을 해온 메인 룸에 비해 약간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몇 곡을 시청하면서 포인트를 잡고 나자 시청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처음엔 본 시스템의 스윗 스팟을 찾기가 다소 난감했다. 상하, 전후 이동에 따라 스테이징과 포커싱이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자리가 잡히자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무엇보다 필자의 귀를 잡아 끈 것은 뛰어난 저 레벨 재생력이었다. 필자로 하여금 자꾸 소리를 작게 줄여보게 만드는 낮은 대역에서의 뚜렷한 반응은 몇 년 전에 시청했던 부르메스터의 풀 시스템을 떠올리게 했다. 부르크너 교향곡 9번의 스케르초를 소리를 점점 줄여 들릴까 말까 한 매우 작은 음량이 되도록 했을 때도 스테이징의 골격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전 대역에 걸쳐 들릴 소리는 다 들리고 있다. 단지, 다이나믹스의 느낌이 완화되었을 뿐이다. 헤드폰을 이용하지 않고 부르크너를 고요한 밤에도 뚜렷한 골격을 갖춰 들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보니 상당히 신선하다.
 
시청곡이 늘어갈수록 분명해지는 생각은 스피커가 매우 잘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리고 예상했듯이, 원 브랜드 시스템이 갖는 최대효과이다. 그리폰이 어떤 소리를 내는 제품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또한 기존의 잘못된 시청으로 인해 생겨난 견해일 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직접 사용하거나 시청해왔던 이전의 앰프들에 비하면 상당히 스피디해져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필자가 알고 있는 그리폰 사운드란 골격이 분명하고 심지가 굳으면서도 다소 느긋하고 유연한 성향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13gd.jpg




여하튼, 지금 듣고 있는 그리폰의 풀 시스템은 정확한 타이밍과 신속한 움직임을 기반으로 매우 선명하고 청량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대역의 구성은 안정적인 구조를 하고 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낮은 대역에서의 선명한 해상력이다. 폴아웃보이의 ‘Thanks For a Memory’를 다시 한 번 끝까지 다 시청하게 만들었다. 정돈이 매우 잘 된, 모드(mod)에 가까운 펑크의 느낌이지만, 혼탁함을 느낀 순간이 한 번도 없이 손에 땀을 쥐는 집중력을 발휘한다. 아울러 시종 바닥을 꿈틀대는 베이스의 선명한 존재감과 작열하는 드러밍의 열기가 깔끔한 일격을 선사한다. 복서로 말하자면 디트로이트의 코브라라 일컬어지던 토마스 헌즈의 폭풍 같은 스트레이트가 작열하고 있는 듯 하다. 자로 잰 듯 반듯한 주먹이 빈틈 없이 날아온다. 일급의 쾌감이다.
 
대편성 합창을 들어보면 이 시스템이 들려주는 결이 곱고 뛰어난 아티큘레이션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마치 가는 실들을 조합해서 만든 굵은 실타래가 출렁이듯 유려하고도 촘촘한 질감이 생동감 넘치게 스쳐가는 느낌이다. 헤레베헤지휘의 바하 ‘B단조 미사’는 마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스토리처럼 드라마틱한 대역을 선사한다. 순음으로 표현되는 미세한 음파의 동작과 넓은 대역을 통해 구사되는 코러스의 하모닉스는 정밀하게 그려진 대형의 동양화를 보고 있는 듯 하다. 작은 수염까지도 묘사된 움직일 듯한 실제의 모습과 옅은 색의 차이를 보이며 사라지다가 다시 빈 공간이 되어 있는 장대한 정적의 세계가 느껴지는 듯 하다.
 
이 시스템이 선사하는 다양한 스타일은 말을 어디에서 멈춰야 할 지 애매하게 한다. 그리폰 시스템은 무음 상태에서는 정적 속에 빨려 들어갈 듯 하지만, 일단 진동이 시작되면 완벽히 가라앉기 직전까지 미세한 움직임도 모두 들려준다. 연주자가 실수하지 않을까 초긴장하는 상태가 된다. 마이크로 다이나믹스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레핀과 아르헤리치가 연주하는 ‘크로이처’에서는 정밀한 움직임에 긴장감이 돈다. 빛에 반사되는 모습에 따라 바이올린의 활이 방향을 바뀌는 순간이 포착되는 듯한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선은 다소 가는 듯하지만 각이 져 있다는 인상이 없이 곱고 찰진 촉감을 느끼게 한다. 

필자의 선입관은 상당 부분 빗나갔다. 바다를 가르는 포세이돈의 삼지창이나 천지를 뒤덮는 악마의 불길도 없었다. 뭔가 초인적인 기운과 화려함의 극치를 달릴 줄로 알았던 막연한 예상은 틀렸다. 그리폰의 풀 시스템은 있는 그대로를 고스란히 옮겨다 보여줄 뿐이었다. 그 세상을 옮겨다 주는 손은 대단히 유려하고 정교하고 거대했다. 그래서 실제 세상과 똑같은 세계를 다시 하나 그려내 주었다. 자연스러움의 극치, 현재의 그리폰이 지향하는 사운드를 그렇게 정리하게 되었다. 그리폰의 홈페이지의 제품 설명을 읽다 보면, 이들은 단어 선택과 문체 등에 있어서도 건조한 설명의 나열을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품설명이라기 보다는 식견 높은 품평의 형태를 하고 있는 유려한 문장들은 마치 스테레오파일의 편집장인 존 앳킨슨의 글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필자가 발견한 중에서는 어느 것 하나 빈틈이 없는 세계, 바로 그리폰 왕국의 철학이 아닐까 한다.
 
단지 음악만을 열심히 듣기 위해서라면 본 3억 짜리 시스템보다 좀더 적은 비용으로도 선택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폰 풀 시스템이 선사하는 것은 하이엔드 기기들에서 종종 희미해져 있는 존재감이라는 컨셉에 그 핵심이 있다. 필자는 그것을 ‘그리폰 스타일’이라 칭하고자 한다. 몸체는 나누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하나의 개념인 ‘정성적 컨버전스’는 동일한 제작소에서 제작되었다 해서 당연히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본 시스템은 진정한 원 브랜드 레퍼런스라 해야 할 것이다. 트라이던트의 위용과 메피스토의 무게처럼, 시청공간과 예산을 놓고 오랜 동안 오디오파일들의 타겟으로 우뚝 솟아 있을 시스템이다.